단상/배설

진격의 거인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

Gwiggystardust 2025. 4. 3. 07:46

*스포일러 주의


얼마 전 진격의 거인을 다시 보면서 느낀 점이 하나 있다.

이 이야기 안에서 크든 작든 간에 서사를 가지고 있는 모든 인물은 이해 가능한 구석이 있거나 혹은 자신의 신념/욕구를 위해 죽고 살았다. 하지만 딱 한 명의 인물이 그렇지 못했다.



하다 못해 작품을 본 사람들 열이면 열 다 악인이라고 말할 마레군 장교(그리샤의 여동생을 죽인) 역시 자신의 뒤틀린 욕구에 충실하게 살다가 죽었다. 얼마나 비참하게 죽었든 그동안 그가 누린 쾌락과 책임져야 할 죄에 비하면 몹시도 고상한 결말일 것이다. 주인공과 그 주변인물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저마다 각자의 신념과 욕구가 있고 그것을 향해 내달리는 삶을 살다 인과에 맞는 결말을 맞이한다.


하지만 에렌의 엄마는 달랐다. 카를라 예거는 서사 전체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비중있는 존재이면서도 굉장히 무력했고 작품의 결말 이후까지 가장 처참한 존재다. 이 여자는 단지 남자 잘 못 만난 죄로 이 비극의 단역에서 굉장히 중요한 조연으로 승격되어 버렸다. 사랑스러운 아이를 낳아 행복한 한 때를 보냈지만 작품에서 그 순간은 고작 찰나였을 뿐, 이야기의 시작과 동시에 카를라 예거는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다. 심지어 알고 보니 그녀의 죽음은 바로 그 사랑스러운 아이의 방관(혹은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 사후에는 어떠한가? 결국 자신의 아이는 괴물의 모습인채로 사랑하는 여자의 손에 죽는, 어미 못지않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심지어 자신으로선 세상 모든 필요를 무시해도 좋을, 그냥 존재만으로 가치 있고 사랑스러웠어야 할 아이가 거대한 운명의 무게에 짓눌려 그런 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마치 진격의 거인의 이야기 자체가 그녀에게 벌어질 수 있는 최악 중의 최악의 결말로 향했다는 느낌이다.


이 이야기의 완결을 가장 처음 보았을 때는 시조 유미르의 운명이 납득이 안 될 정도로 비극적이라고 생각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에 빠졌고, 사랑에 빠진 대가로 수천 년간 시간도 공간도 희미한 곳에 갇혀 고사리 손으로 모래를 쌓아 올려 쉼 없이 거인을 만들어야 했던 그 운명이 어찌나 기괴하고 갑갑하게 느껴졌던지.

근데 결말을 알고 이 이야기를 다시 보는 입장에선 최소한 유미르는 그 비극의 끝에 성불할 기회라도 얻었지만 카를라는 그냥 비극의 도구가 되어 끔찍한 죽음으로 내몰렸고 사후에도 그 비극은 끝나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의 신념과 욕망을 위해서 싸우는 세계관에서 홀로 그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죽어서도 비극뿐인 존재라니. 어찌 보면 주인공인 에렌 예거보다도 더욱 비극적인 인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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