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영화

세상의 끝까지 21일을 보고

Gwiggystardust 2024. 12. 30. 07:02


1. 원제는 Seeking a friend for the end of the world. 국내 개봉은 세상의 끝까지 21일이라는 제목으로 했다. 내 정서로는 국내 개봉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하지만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도지와 페니의 만남이 종말 D-14라는 점. 실제 종말은 그보다 훨씬 일찍 찾아온다는 점에서 이야기에 부합하는 제목은 아니다. 내 계산으로는 도지와 페니에게 주어졌던 시간은 7일이다. 종말의 도래일이 21일 남았다는 사실 자체는 영화에서 크게 중요하진 않은 듯 하다.

2. 종말이라는 설정에 비해 내용은 한 없이 가볍고 일상적이다. 종말을 주제로 하는 영화에서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미친놈들은 딱히 크게 다루지 않는다. 일부 군중이 폭도가 되어 소란을 부리는 장면이 잠시 스쳐갈 뿐이다. 이 영화에서 다뤄지는 인물들은 의외로 평범하다. 물론 평시를 기준으로 하면 90%쯤 돌아있는 태도를 하고 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듯.

3. ‘내일 세상이 멸망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이 떠오르는 작품이다. 우리가 종말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그 클리셰가 아니라 적당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비교적 평범하게 남은 시간을 보내려는 사람들의 태도가 인상적이다. 의외로 우리에게 익숙한 종말의 풍경보다는 이 쪽이 더 현실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종말을 다루는 가장 사랑스럽고 귀여운 영화가 아닐까. 이야기의 톤도 그렇지만 미술이나 대사 등등, 우중충함이라고는 1도 없이 시종일관 밝고 따듯한 색채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종말을 앞둔 이들이 밥을 함께 지어먹거나, 소중한 음악을 나눠 듣거나, 첫사랑과 가족을 찾아가고 대화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는 내용이다.

5. 늘 잠에 취해 중요한 순간과 기회를 놓쳐왔던 페니는 종말의 순간에 늦지 않고 도지에게 되돌아온다. 잠든 페니를 비행기에 태워 그녀의 가족에게 보낸 일은 도지 입장에서는 페니를 위한 배려였지만 페니가 되돌아온 순간 도지입장에선 모든 게 분명해졌다. 이 순간 이 여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도지 자신이라는 것을.

6. 저마다 행복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이 영화의 결말이 내가 평소 상상하던 가장 완벽한 행복에 가까운 듯. 세상이 망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한날한시에, 그것도 서로를 향한 마음이 가장 거대할 때 인생의 마지막을 맞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7. 어릴 땐 몰랐는데 왜 이런 아포칼립스 장르에 환장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조금은 알듯싶다. 아마 세상의 끝이라는 설정 자체에 이끌린다기 보다는 이런 이야기들이 늘 다뤄오는 그 끝의 목전에 가서야 누릴 수 있는 소중하고 특별한 순간을 보고싶어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8. 실제로 내게 이런 상황이 닥치면 그냥 가방 챙겨서 자전거 타고 어디로든 향할 것 같다. 그렇지만 종말이 친절하게도 따스한 봄에 방문해 주어야 가능한 일일 듯. 종말이 온다면 따듯한 봄날에 오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나보다. 남반구에서 쌀쌀한 날씨에 종말을 맞이할 분들, 지송요.

9. As the World Caves In이라는 곡을 들을 때마다 이 영화의 결말이 떠올랐다.

세상의 끝까지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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