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나의 기억 속 이 영화는 죽음과 실존하는 절망을 다루는 무지막지하게 우울한 영화였다. 10년만에 영화를 다시 틀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몇 톨의 씨앗이었던 나의 우울함이 이제는 질기고 무성해져 내 마음속에 깊숙하게 뿌리 내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영화의 분위기가 처음 볼 때보다 지금 더 나에게 익숙하다고 느낀 탓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주제와 메세지는 너무나도 명료해서 영화가 풍기는 분위기에 취해 나 혼자 스스로의 감정에 말려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금세 이야기에 집중 할 수 있었다.
3. 주인공 헨리 바스는 굉장히 단단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익숙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그 단단한 껍질 안에는 텅 빈 공허가 있었고 그 공허 속에는 해결되지 않은 혼란과 고통이 쉬지 않고 메아리치고 있다.
4. 그리고 때로 그 메아리가 껍질을 뒤흔들고 밖으로 퍼져 나와 그의 불같은 행동으로 표출된다. 굉장히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분출해낸다. 이렇듯 결국 그도 한 명의 인간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이 몇몇 있었기에 헨리 바스라는 캐릭터가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이 영화가 더 좋게 느껴졌다.
5. 헨리가 에리카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보살펴 줄 때 에리카의 그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돌봄을 겪어 본 적이 없는 불쌍한 유기견이 애정 어린 손길을 처음 겪었을 때처럼. 싫지 않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그 당황스러워하는 눈빛을 보는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 안에서 가장 슬프게 느껴진 장면.
6. 메레디스와 에리카의 운명을 가른 것은 헨리와의 거리였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물리적인 거리. 피부와 피부의 맞닿음 정도. 얼마나 가까이서 목소리를 들으며 음식을 나누어 먹을 수 있는지. 서로의 깊은 솔직함이 허용되는 관계인지의 여부가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메레디스는 헨리의 학생이었지만 에리카는 헨리의 가족의 위치에 있었다. 영화는 이를 통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누가 제공 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인 셈이다.
7. 제공되는 현실과 요구되는 책임의 간극에 놓여 각자의 방식으로 괴로워하고 절규하는 다른 교사들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8.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가정에서 제공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나의 경우에도 그랬다. 세상의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그렇게 무관심 속에 방치된 채로 자라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 수가 적든 많든 지독히도 불행스러운 상황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동시에 그 아이들이 다 자라날 미래를 생각하면 끔찍하게 우려스러운 상황이기도 하다.
9. 그러면서도 세상은 아이들에게 제공되지 않는 필수적인 것들을 사회와 제도로 보충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교사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고 제도와 규칙이 변모함에 따라 그 범주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음에도, 세상은 마치 교사들에게 마치 영혼을 정화하는 성직자의 역할을 요구하는 듯하다. 아이들을 올바르게 이끌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책임은 학교가 아니라 가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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