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최근에 ‘세상의 끝까지 21일’을 보고 비슷한 장르에 흥미가 생겨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이번이 이 작품의 세 번째 감상이다.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 이런 영화는 이 영화밖에 없다.
2. 나는 어떤 문제해결을 대할 때 감정이 앞서거나 그 비중이 커지는 것을 옳지 않다고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가장 이해되는 캐릭터는 시종일관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디비아스키였다.
3. 다른 캐릭터들을 풍자하는 방식과 달리 디비아스키는 그 결이 조금 다르다 느꼈다. 그녀의 감정적인 대응은 ‘나였어도 저랬겠다.’ 싶다는 생각이 든다. 가만 생각하면 디비아스키에게는 이성적으로 행동할만한 여지가 없었다. 예컨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의 목 끝에 칼이 겨눠져 있는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이다. 그 누가 어떻게 감정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하는 사람이라면 둘 중 하나다. 사실 이성이고 뭐고 그냥 다 포기한 상태이거나 애초에 모든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슈퍼맨이거나.
4. 영화는 여러 부분을 풍자하지만 그중 가장 큰 줄기는 ‘리더십’에 대한 내용으로 보였다. 현실에서의 리더십이란 좋은 덕목이자 희소한 능력이다. 하지만 리더십이라는 덕목에는 ‘과대평가’라는 비곗덩어리가 끼어있다. 마치 리더십 그 자체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고, 바른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다는 믿는 ‘오만함’이 그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의미의 리더십과 단순히 카리스마를 통한 장악력의 혼동이라 해야겠다. 관련분야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없는 사람이 조직에 대한 장악력만을 앞세워 의사결정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결함 있는 리더십이 강력하게 작용하기만 할 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빈번한 현실이다. 영화는 이 부분을 제대로 움켜쥐고 매우 아프게 비틀고 있다.
5. 소행성 디비아스키의 1차 궤도 수정 작전 도중 모종의 이유로 작전이 중단된다. 첫 감상에서 이 장면을 보고 느꼈던 감상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 이런 세상이라면 그냥 망하는 게 낫겠다.’ 이때부터는 얼마나 웃기고 골 때리는 방식으로 이 세상이 망해가는지를 기대하면서 영화를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6. 공개된 지 꽤 된 작품이라 작품의 방향이나 태도에 대해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처음 공개 때만 해도 이 영화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꽤 보였다. 이 영화의 풍자 범위에 자기 자신은 빠져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영화를 보고 현실정치를 거론하며 작품이 특정 이념이나 정당, 인물만을 조롱한다고 치부했다. 하지만 이를 어쩐다… 돈 룩 업은 대놓고 우리 모두를 조롱하고 놀리는 작품이다. 본능적으로 자극에 이끌리는 현대인이라면 예외란 없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7. 한 가지 더 웃픈 사실이 있다. 이 영화는 미국의 평단으로부터 혹평을 받은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잘 만든, 훌륭한 풍자극이라고 생각하지만 영화는 완성도에 비해 상당히 박한 평가를 받았다. 이 영화를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고 받아들인 평론가들의 꼬장이 아니었을까 매우 깊이 의심된다.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이 마냥 안타깝진 아니꼽진 않았다. 그러한 치졸한 반응조차도 진정한 의미에서 이 이야기의 완성이자 연장 같다고 느껴져서 유쾌하게 느껴졌기 때문.
8. 영화는 전체적으로 풍자의 농도가 굉장히 짙기 때문에 인물들의 행동이나 반응이 비현실 적인 부분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정치인, 기업인, 과학자, 연예인, 언론인이 나타나도 그리 놀랍지는 않을 것 같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느 정도 기시감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해야할까.
9. 결말부는 민디 박사의 파트와 올린 대통령 파트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민디 박사의 파트는 이 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굉장히 현실적이고 로맨틱하게 느껴지는 장면이다. ‘세상의 끝에서 21일’이 로맨틱한 연인의 관계에서의 최후를 아름답게 그렸다면 돈 룩업은 그 관계를 가족과 친구의 관계까지 확장하여 비슷한 듯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올린 대통령의 파트는 시종일관 골 때리던 이 영화에서 가장 우습고 통쾌한 장면이었다. 96.5%의 정확도를 가진 배사가 민디 박사의 최후를 예측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올린 대통령의 최후는 정확하게 예측했다는 점. 인류 존속의 의무를 진 이들 대부분이 번식기를 한참 지난 늙은 몸인 데다 전부 알몸에 제대로 된 보호책도 없이 지구와 유사한 환경에 던져져 인류의 최후가 뻔히 보인다는 점이 그랬다.
10. 내가 자꾸 이 영화의 내용을 현실과 구분 지으려고 하고 촌극 취급하며 웃어넘기려 하지만 딱 한 가지 예외적인 부분이 있다. 작품이 대중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유독 이 부분은 지독하게도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가장 소름 끼쳤던 부분은 종말을 걱정하는 척 은근슬쩍 자신의 쓰레기같은 가십을 끼워 넣은 음악을 파는 가수(매너티에서 룩업으로 갈아탄)와 거기에 열렬한 환호를 하며 “룩 업!”을 외치는 군중들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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